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우연인가 운명인가
예전부터 보고싶던 밀란 쿤데라의 역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드디어 봤다. 내가 이 책을 보고 싶었던 이유는 바로 우연과 필연 그리고 인간의 운명에 관한 통찰을 남녀관계라는 설정을 통한 문학적 표현으로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론은 이런 부분에 대한 통찰은 소설 초반부에 어느정도 약간 충족되긴 했지만 부족한 맛이 있었다. 이런 주제로 일관되게 진행될 줄 알았는데 이 책은 다소 많은 내용과 주제와 메시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양한 메시지와 저자의 사상은 일맥상통하다. 바로 인간 존재의 가벼움을 말하고 있는 것. 개와 사람의 사랑이 사람과 사람과의 사랑보다 낫다고 피력하는 점, 지구인이 동물 위에 군림하며 잡아먹고 살듯 외계인이 지구인을 잡아먹으며 살 수도 있다는 점, 똥을 소재로 인간의 신성하지 않은 면을 코믹하고도 진지하게 설파하는 점 등등등....
모든 메시지가 결국 하나의 주제로 관통되는 점에서도 걸작이지만 이것을 문학적으로 상징적으로 예시적으로 표현하면서 중간중간 저자의 메시지가 직설적으로 삽입되는 점도 독자들을 이해하기 쉽게 한다.
내가 이 책을 읽은 것은 우연일까? 운명일까? 우연과 운명의 정의부터 확실히 해야한다. 여기서 말하는 운명은 그 사건이 꼭 발생할 수 밖에 없었음을 말한다. 반면에, 우연은 각 개개인의 당사자에게 꼭 발생할 그런 것이 아니었던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건일뿐이라는 것이다.
'너와 나의 만남은 운명이야'라는 상투적 표현에서 말하는 것은 운명의 뜻을 잘 내포하는 어구 중 하나이다. 너와 나는 만날 수 밖에 없고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천생연분.....우리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하늘이 만들어준 점지해준 사랑이라는 의미....허나, 소설 속에서는 그런 신념과 바람을 담담히 혹은 무참히 깨버린다. 각 개개인이 태어나서 교육받고 어떤 사회에서 살며 공감대를 가지며 행동하고 이동하며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과 일들은 사람들과의 교차점과 접점은 모두 운명이 아닌 인간이 만든 우연일뿐이라는 점. 철저한 인과율만이 지배당하는 인간사, 아니 세상사,,,아니 자연사의 한 부분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노력하는 가여운 인간들.....
여기까지 생각해보면 확실힌 모든 것은 우연이다. 그런데 한번 더 생각해보자. 철저한 인과율 마저 운명으로 생각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부모라는 존재가 나를 낳은 것, 선천적 질병, 후천적 사고 등 마저도 어느정도 예상된 운명이라면? 여기서 말하는 운명은 위에 예에서 설명한 운명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 다소, 동양철학과 연관된 운명의 의미다. 동양철학의 역술 또는 역학에서 말하는 운명은 운과 명이다. 운은 1년마다 변하는 세운, 10년마다 변하는 대운, 하루마다 변하는 일운, 월운 등이 있고 명은 개개인의 타고난 체질과 성향, 적성 여러 종류의 복의 정도와 유무가 담긴 유전자 코드 같은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모든 것을 단순히 우연이라고만 하기도 어렵다. 실상, 개개인마다 주어진 환경과 체질이 다르고 이에 따라 생각과 행동이 좌우되면 결국 만날 사람이 만나서 결혼하고 사고 당할 사람이 사고 당하는 필연적 사건들이 자주 발생하기 마련이다.
자, 그럼 우연인가? 필연인가? 우연인가? 운명인가? 이 질문에 대한 완벽한 해답은 밝혀질 수 있을까? 이것은 개개인의 몫으로 남겨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우연적 사건과 운명적/필연적 사건이 혼재된 세상이라고 보고 있다. 더 확실하고 자신있고 체계적인 신념과 사상은 내가 죽기 전에 정립될 수 있기를 바란다.
아래는 마음에 드는 구절 발췌....
- 인간이 신체의 모든 부분에 이름을 붙이고 난 뒤부터 육체는 인간을 덜 불안하게 했다. 영혼이란 뇌의 피질부 활동에 불과하다는 것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은 과학의 전문용어에 가려졌고 오늘날에는 그저 싱거운 웃음을 자아내는, 시대에 뒤떨어진 편견에 불과하다. 그러나 누군가를 미친 듯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창자가 내는 꾸르륵 소리를 한번 듣기만 한다면,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 과학 시대의 서정적 환상은 단번에 깨지고 만다.
- 토마스 대신에 동네 푸줏간 주인이 테이블에 앉았다면 테레사는 라디오에서 베토벤의 음악이 나오는 것을 주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 싹이 트는 사랑은 그녀의 미적 감각의 날을 날카롭게 세웠다.
- B를 위해 A를 배신했는데, 다시 B를 배신한다 해서 A와 화해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